주제: 소원
땅이 갈라지고 불타며 생명을 없앴다. 검은 로브는 먼지와 피가 묻어있었지만 꼿꼿이 서있었다.
“내가.. 희생할께.”
“은월!”
경악어린 목소리들이 질타했다.
“희생하지 않으면 검은마법사는 계속 존재하잖아? 우리는 그걸 막기 위해 모인 거니까 괜찮아. 내가 할께.”
저마다의 인물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치욕과 분노가 범벅되어 자기혐오감으로 변하는 눈동자들이 은월을 쳐다봤다. 자기혐오로 가득찬 눈들을 은월이 부드러운 웃음으로 대꾸했다.
콰아앙!!
하얀 빛이 터져나왔다. 섬광은 눈을 가렸다. 그리고 추억도 가렸다.
*
쫑긋거리는 여우귀가 풀숲에서 튀어나왔다. 위아래로 움직이는 귀가 재빠르게 파닥거렸다.
“심장소리..”
녹빛의 풀밭에 검은 머리는 이질적이였다.
“이게 뭐지? 귀가 없네? 꼬리도 없어!”
-
“가지마!! 그냥 여기에 있자!!”
눈물은 볼을 타고 턱에서 떨어져내렸다. 방울지는 눈물이 풀의 숨을 죽이고 은월의 숨도 죽였다.
“랑아..”
안타까움이 가득 들어간 목소리가 떨렸다. 안타까움을 뒤로하고 또다른 인연을 뒤로했다. 움직이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
“하아...”
내뱉어진 한숨이 귀를 때렸다. 재빠른 발걸음이 숲을 지나쳐 사람의 흔적을 찾았다. 낙낙한 흙길이 사람의 흔적을 안내했다.
“저기... 검은마법사는 봉인이 된지 얼마나 되었나요?”
“으엉? 뭐야 당신 어디에서 왔길래 그런 것도 모르는거야? 위대한 다섯명의 영웅들이 검은마법사를 봉인한지 10년이 되었네! 그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가 이렇게 발 뻗고 편안하게 살고 있는걸세!”
은월의 손이 주먹을 쥐었다.
“혹... 말입니다.. 혹... 은.. 은월이라는 이를 아십니까..?”
꼬랑지 수염을 쓰다듬던 남자가 궁금증이 가득 담긴 표정을 지었다.
“응? 은월이라니? 그게 누군가? 혹시 자네가 아는 사람인가?”
어리둥절한 이의 얼굴에 은월이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뒤를 돌아 길을 가는 뒷모습에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음.. 은월이라.. 그게 누구... 방금 누가 왔다가 갔던가..?”
남자는 귀를 후비적거리고는 과일을 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
“기억.. 하지못해기억하지못해기억하지못해기억하지못해”
멍한 눈빛의 은월이 비틀거리며 길을 걸었다. 나뭇가지와 부딫쳐 몸 곳곳에 상처가 나 피가 배어나왔다. 널다라한 공간이 나타났다. 작은 연못과 평평한 공간에 은월이 주저앉았다. 차가운 연못물에 은월의 손이 담겼다.
“하... 으...”
차가운 물이 은월의 얼굴을 때리고 은월이 고개를 숙였다.
“.... 랑.. 랑... 랑...!!!”
은월이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반짝이며 은월이 사라졌다.
*
은월이 풀밭에 내려앉았다. 비틀거리며 은월이 달려나갔다. 초목으로 이루어진 집들이 나타났다.
“저게 뭐야? 귀가 없어! 꼬리도 없는데?!”
수근거리는 목소리가 은월의 귀를 때렸다. 경계어린 눈들이 은월을 괴롭혔다. 은월이 사라졌다. 다른 존재에 수근거리던 입들이 곧 사라졌다.
*
“나를... 나를 기억하지 못해... 나를...”
눈물로 범벅이 되어버린 은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그러진 몸이 잔뜩 웅크려졌다.
“나를.. 기억해줘...”
번쩍
눈이 나타났다. 울멍거리는 눈이 눈물을 쏟아냈다.
“하...”
은월이 제 눈을 닦고 머리를 비볐다. 흐느적거리며 몸을 움직여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잘게 들리고 물로 축 처진 은월이 나타났다. 잘게 움직여 부엌으로 향한 은월이 볼을 긁적였다.
“먹을게 없네..”
터덜터덜 움직이던 은월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나타난 마을에 은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모험가니? 처음 보는 얼굴이구나.”
인자한 얼굴과 인자한 물음에 은월이 어색하게 웃었다. 밍기적거리며 식료품을 산 은월이 뒤를 돌았다.
“처음보는 얼굴이구려 허허”
은월의 귀가 쫑긋거렸다. 늦은 걸음이 움직였다. 현관에 은월이 주저앉았다. 식료품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나를.. 기억해줘.. 제발.. 나를..!! 은월이란 존재를.. 기억해줘..”
은월이 몸을 구부렸다. 구부정하게 옹송그려진 몸이 애처로이 떨렸다.
“소원이.. 하나 있어요.. 누군가.. 제발.. 누군가가... 저를 기억하게 해주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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