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비린내가 만연했다. 썩은 내 나는 시체들 사이로 보여야 할 땅이 피로 덮여 보이지 않았다. 넓다른 평원 가득 전쟁의 흔적이 흩어져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핏덩이와 시체들 사이 피 웅덩이 하나가 회오리쳤다. 회오리는 점점 커져 말라붙지 않은 피를 모았다. 용오름이 솟듯 솟아오른 핏빛 회오리가 평원에 있는 피를 아귀처럼 긁어모았다. 회오리가 점차 멈춰가고 그 안에 인영이 생겨났다.

 

파앙!

 

회오리가 사라졌다. 찬란한 은발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하얀 얼굴에 옅은 핏방울이 도드라졌다.

 

“V. 루미너스..”

 

살짝 손을 올리자 루미너스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묻어 있던 피가 모여들었다. 조약돌 같은 크기의 핏방울이 루미너스의 앞에 나타났다.

 

흐응...”

 

핏방울이 아래로 떨어져 흩어졌다. 평원 가득 메워진 시체의 행보에 루미너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찰박

 

발걸음 걸음마다 응고되지 않은 피들이 모여 루미너스의 뒤를 쫓았다. 시체의 평원이 끝났다. 커다란 핏방울이 루미너스의 어깻죽지로 붙었다. 얇은 피막을 가진 날개가 솟구쳤고 루미너스의 오드아이가 안광을 발했다. 잔상이 남았다. 매끈하게 날아오른 동체가 점이 되어 사라졌다.

 

-

 

매끈한 벽에 피가 말라붙어있었다. 하나같이 곱고 미인인 이들이 피를 흘리고 장기를 내보이며 일광욕을 즐겼다. 부서진 천장 사이로 내리쬐는 햇볕이 어두운 공간에 내려앉았다. 어지러이 흩어진 시신들 사이사이 어그러진 갑주가 있었다. 어그러진 갑주들 위로 피가 검붉게 말라붙어있었다. 하얗기만 한 벽과 천장, 그와 대비돼 듯 검붉고 어그러진 바닥이 햇빛에 조금씩 모습을 보였다. 뽀얀 먼지가 공간을 활보하고 썩은 내가 돌아다니며 시체를 불태웠다.

 

햇빛이 가장 들지 않는 곳, 움푹 팬 바닥에 고인 피 웅덩이가 잘게 회오리쳤다. 피 웅덩이가 점점 강하게 회오리치며 주변의 피를 끌어모았다. 꿈틀거리던 표면이 빠르게 용솟음쳤다. 짙게 회오리치던 피가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물결치듯 위아래로 흔들리며 돌던 회오리가 멈췄다.

 

촤아악

 

피가 아래로 떨어지며 사방으로 퍼졌다. 회오리가 있던 중심에 미형의 인형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결 좋은 금발에서 핏줄기들이 떨어졌다. 도자기 같은 얼굴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V. 팬텀

 

야살스레 올라간 입꼬리가 매혹적이게 빛을 발했다.

 

 

손가락 튕기는 소리와 함께 팬텀의 몸에 남아있는 피가 동그랗게 모여들었다.

 

철퍽

 

동그란 핏덩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주변을 둘러보던 팬텀이 몸을 움직였다. 걸음이 앞으로 향할수록 피가 팬텀의 뒤로 모여들었다. 공간에 하나뿐인 문을 열자 햇빛이 들어왔다. 햇빛은 팬텀의 금발을 간질이고 보랏빛 눈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커다란 핏방울이 팬텀의 어깻죽지를 노리고 들어섰다. 선명한 피막 날개가 솟았다. 산뜻한 공기가 요동쳤다. 재빠르게 움직이는 팬텀이 점이 되어 사라졌다. 공간을 가득 채웠던 시체 썩은 내가 산뜻한 공기를 좀먹어갔다. 시체 썩은 내가 유희를 나갔다.

 

*

 

시원스레 쭉 뻗은 손가락이 원목 탁자를 두드렸다. 나긋나긋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 탁자 위에서 춤을 추었다.

 

보충할 때가 되었나..”

 

매끈한 미간을 찌푸린 루미너스가 관자놀이 주변을 눌렀다. 설레설레 고개를 저은 루미너스가 몸을 일으켜 창문으로 향했다.

 

아무거나 골라야겠군.”

 

루미너스가 창문을 넘어서고 날개가 튀어나와 몸을 지탱했다. 따스한 햇볕만 남아 반짝였다.

 

·

 

 

루미너스의 팔목에서 핏줄기가 솟아올랐다. 어두운 밤하늘에 커다란 보름달이 생글거렸다. 여러 가닥으로 나누어진 핏줄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자아를 가진 듯 핏줄기가 제각기 나뉘어 마을 안으로 섞여들어 갔다. 루미너스가 몸에 긴장을 풀어냈다. 중소규모의 마을 위로 커다란 보름달이 빛을 내려 루미너스 가까이 다가왔다. 환한 달빛이 루미너스의 은발에 관심을 가졌다. 살랑이는 바람결에 은발이 휘날리고 청안과 홍안의 오드아이가 달빛에 반짝였다.

 

두툼한 뱀 여러 마리가 마을 바닥을 휘저었다. 크기와 맞지 않는 날렵함을 지니고 루미너스의 가까이에 다가왔다. 처음 루미너스의 팔목에서 나온 핏줄기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불어 오른 핏덩이들이 루미너스의 팔에 감겨들었다. 팔목의 상처를 비집고 핏덩이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팔목이 과대한 핏덩이로 인해 꿀렁였다. 마지막 꼬리까지 루미너스의 팔목으로 흡수되고 상처가 아물었다. 옷매무새를 툭툭 털어낸 루미너스가 날개를 펼쳐냈다.

 

달빛에 흐드러진 외형은 흡사 신화 속 천사와도 같았으나 풍채를 들어낸 날개는 날카롭고 탐욕스러웠다. 피막의 날개가 움직였다. 달빛이 뒤를 쫓을 새도 없이 루미너스의 모습이 사라졌다. 옅은 혈향이 공기에 남아 바람을 간질였다.

 

-

 

까딱이는 발끝이 박자를 맞췄다. 턱을 괸 손이 하얗게 빛을 받았다. 장난 가득한 얼굴이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이어갔다.

 

흐음, 미각을 충족시킬 이는 누구려나... 역시 미인이려나?”

 

팬텀이 제 입술을 혀로 핥았다. 반들거리는 보랏빛 눈이 마을을 내려보며 먹이를 찾아 훑었다. 길을 지나는 청년, 아이, 노인, 여인 등 수많은 사람이 팬텀의 눈에 스쳐 지나갔다. 팬텀이 불만스러운 듯 볼을 부풀리고 입술을 비죽였다.

 

그 놈의 천 년의 시간. 그냥 백년마다 하면 좋을 걸. 각인될 놈팡이하고 만나면 이런 짓은 안 해도 될 텐데. !”

 

팬텀이 의자에 등을 기댔다. 피로 이루어진 의자가 울렁였다. 길쭉한 손가락이 팔걸이를 두드렸다. 젤리처럼 적당히 들어가는 탄력에 팬텀이 손가락을 꾹꾹 눌렀다. 원하는 걸 얻지 못해 울어 재끼는 마을 아이처럼 팬텀이 잔뜩 볼을 부풀렸다. 울렁거리고 매끈매끈한 의자 위에서 팬텀이 벌떡 일어섰다.

 

뱀파이어인데 뭐 이런 걸 고민해! 그냥 저지르면 되는 거지!”

 

움틀 거리던 의자가 흩어졌다. 점점이 흩어진 핏방울들이 팬텀의 뒤를 점했다. 매끄러운 미소가 지어진 팬텀이 손을 올렸다.

 

어여쁜 아가씨들한테 다녀와.”

 

핏방울이 흩어졌다. 팬텀이 제 손가락을 튕기며 눈을 크게 떴다.

 

, 잠깐잠깐! 돌아와! 아직 밤이 아니잖아. 낮에는 뱀파이어의 매력이 부족해.”

 

흩어지던 핏방울이 다시 모여들어 의자의 형태를 갖춰갔다. 팬텀이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 앉았다.

 

, 이 완벽한 이벤트성. 화려함은 뱀파이어의 기본이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까딱이던 팬텀이 해를 응시했다.

 

빨리 수평선 밖으로 몸을 숨겨줘, 태양. 뱀파이어가 화려한 몸을 숨기고 기다리고 있다고?”

 

팬텀이 해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말캉한 의자에 팬텀의 몸이 기대어졌다.

 

·

 

달이 고개를 쳐들었다. 우월감 섞인 미소를 지으며 팔을 벌리고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검은 그림자가 일어섰다. 달빛에 장신구들이 반짝이고 붉은 의자가 점점이 흩어졌다.

 

미인들을 골라서, 밤의 귀족이니까.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취하는 밤의 귀족. 아참, 미인은 소중하니까 상냥한 거 잊지 말고.”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꼬리와 함께 방울들이 사라졌다. 마을 곳곳에 들어가 몸체를 불리며 돌아다니는 방울들이 팬텀의 눈에 선명히 틀어박혔다. 곧게 몸을 세운 팬텀이 눈을 감았다. 살랑이던 밤바람이 옅은 혈향에 취해 몸을 비틀거렸다. 환한 금발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졌다. 장신구들이 바람결을 타고 동당거렸다. 작달막하던 방울들이 어른 주먹만큼 커졌을까, 하나둘씩 팬텀을 향해 날아갔다. 동그란 방울들이 휘영청 한 달빛에 의해 반짝였다.

 

팬텀의 팔 근처에 있던 방울이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꿨다. 팬텀의 팔목이 방울에 의해 드러났다. 상처가 벌겋게 드러나 있었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고 오히려 그 상처 속으로 방울들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얇게 포가 뜨인 것처럼 납작해진 방울들이 연이어 팔목으로 들어가고 팬텀의 팔뚝이 솟아올랐다. 꿀렁이며 들어가는 방울들이 점차 줄고 옷을 올리던 방울까지 들어가며 상처가 사라졌다.

 

후우, 이제 마실을 끝내볼까?”

 

팬텀의 입술이 매끄럽게 올라갔다. 밝게 빛을 뿌리는 달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린 팬텀이 몸을 날렸다. 팬텀의 뒤에서 날개가 펴졌다. 하얀 달빛에 화려한 금발이 흐드러졌다. 팬텀의 자안이 투명해졌다. 강하고도 우아하게 날개가 움직이자 팬텀의 몸이 금세 작아졌다. 달빛이 아쉬워하며 팬텀의 뒤를 쫓았다. 혈향에 취해있던 바람이 놀라며 깨어나고 부끄러운 듯 몸을 숨겼다.

 

*

 

고딕풍의 성이 안갯속에서 나타났다. 높게 솟은 첨탑이 달을 노렸다. 검은 그림자가 속속히 나타나 성과 가까워졌다. 밝은 달무리가 안개를 홀리자 안개는 성을 감싸 안았다. 까맣게 무리를 지은 것처럼 모여든 그림자들이 성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안개가 성을 완전히 감싸고 성이 모습을 감췄다.

 

-

 

하늘거리는 레이스커튼이 성 내부에서 팔랑였다. 통로를 잇고 이어가자 홀이 나타났다. 홀에는 수많은 이들과 함께 먹을거리가 놓여있었다.

 

호오, 이번 축제에는 좋은 레드와인이 많은데?”

 

, 커피 향이 좋군. 루왁 커피까지는 가져올 수 없었나 보군..”

 

이번 축제의 녹차도 상당하네. 가져가 볼까나.”

 

역시 축제 때 먹는 초콜릿이 제일 맛있다니까!”

 

조곤조곤하지만 복작복작하게 저마다의 입맛을 드러냈다.

 

이번 축제 때 신생은 얼마 안 되어 보이는군.”

 

붉은 머리의 남성이 와인잔을 흔들며 새로운 이야기의 물꼬를 틔웠다. 순식간에 이야기가 부풀려졌다.

 

각인되는 녀석들 보기도 힘들 거 같긴 하던데..”

 

이번 신생은 몇이야? ? ?”

 

아마 홀수일걸? 셋이던가.”

 

, 저기. 저기 못 보던 놈 하나 있네. 나머지는 오지도 않은 건가?”

 

오랜만이라고 순한 놈이 나왔구먼.”

 

저 녀석 각인은 동족이 아니겠는데?”

 

눈치를 보며 먹을거리가 가득한 탁자를 둘러보는 주홍빛 청년을 홀에 있던 이들이 훔쳐보았다. 초콜릿이 가득한 곳에 자리를 잡고 초콜릿을 집어 먹자 토끼 눈을 하는 청년의 모습에 청년을 주시하던 이들이 미소를 지었다.

 

저쪽 신생은 토끼인데? 이종족일 것 같다. 끌끌.”

 

토끼네, 토끼. 잡아먹어야 할 놈이 잡아먹히게 생겼어.”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환한 금발이 와인잔을 들었다.

 

흐응 아무래도 제 상대는 없는 것 같네요.”

 

짓궂은 감정 가득한 말에 고개가 돌아갔다. 금발이 살랑이며 자빛의 눈을 간질였다.

 

신생?”

 

. 790 정도 되었을 겁니다.”

 

매끈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모여 있던 이들이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아직 한 놈이 더 와야 해. 이미 성 내부에는 있을 터인데 아마 홀을 못 찾고 있거나 귀찮아서 홀에 안 왔을 수도 있는 거지.”

 

팬텀의 자안이 의구심으로 가득 찼다.

 

여기 안 와도 되는 겁니까.”

 

진심이 담긴 목소리에 모여 있던 이들이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한 명이 입을 열었다.

 

아아 그건 아닌데, 뭐랄까. 어차피 여기 모이는 건 각인상대 찾는 거 70%, 맛 좋은 음식 먹는 거 20%, 나머지 10%가 잡다하게 이야기하려고 모이는 거니까. 그냥 와서 얼굴만 비치면 그 다음은 상관하지 않는다는 거지. 1초라도 누군가한테 얼굴을 보이면 그냥 가도 상관없어. 어차피 각인은 얼마나 같이 있느냐가 아닌, 본능이거든.”

 

입꼬리만 올라가며 미소 짓는 그 모습에 다른 이들이 킬킬대며 웃었다. 장난 가득한 목소리가 미소를 헝클었다.

 

그 본능을 못 찾은 자네가 할 말은 아닌 거 같네만?”

 

은근한 미소가 깨어지자 여러 웃음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요란스런 웃음소리에 팬텀이 뒷걸음쳐 몸을 빼내었다.

 

쿠웅

 

뱀파이어는 심장이 뛰지 않는 존재로서, 생에 단 한 번 심장이 뛴다.

 

팬텀이 몸을 움직였다. 지금껏 살아오며 맡아본 적 없는 달콤한 혈향에 팬텀의 몸이 빠르게 움직였다. 은발이 휘날렸다.

 

각인인가 보네.”

 

부럽네.. 저렇게 바로 찾다니..”

 

“1000년도 안 된 놈들이 벌써 각인 찾았네. 경우야 드물지마는 모습을 볼 줄이야.”

 

배 아프다아.”

 

술렁이는 목소리들은 곧 사그라지고 금빛과 은빛이 마주쳤다. 시선들이 금빛과 은빛을 향했다.

 

목 물어뜯고 싶은데, 각인 씨?”

 

목덜미를 뜯어 삼키고 싶군, 각인.”

 

집착이 묻어 나왔다. 팬텀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렇게 빨리 만날 줄은 몰랐는걸?”

 

나 역시. 이름은?”

 

팬텀. 너는?”

 

루미너스.”

 

루미너스의 얼굴이 미세하게 허물어졌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팬텀이 제 얼굴을 활짝 폈다. 달콤한 혈향이 코에 머무르고 머릿속을 휘저었다.

 

*

 

어두운 공간에 약한 빛이 깜빡였다. 깜빡이는 빛에 공간이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냈다. 하얀 원 안에 루미너스와 팬텀이 마주보고 앉아 숨을 고르게 내쉬었다. 둘이 앉은 원 밖으로 복잡한 선이 엉켜있었다. 선을 차근차근 풀어볼수록 하나같이 유려하고 부드러운 문양들과 알 수 없는 그림들로 복잡했다. 동그란 원과 그 밖의 문양, 그리고 앉아있는 둘의 사이에 있는 작은 원까지 공간은 고즈넉하지만, 위엄을 품은 채 존재했다.

 

루미너스와 팬텀의 양 손목이 갈라졌다. 작은 피 한 방울이 둘 가운데에 있는 원에 떨어졌다. 원보다 크기가 조금 작은 그릇이 나타났다. 하얀 그릇이 깜빡이는 빛에 의해 은빛으로 빛을 발했다. 루미너스와 팬텀의 손목에서 핏줄기가 솟았다. 솟아오른 핏줄기가 느릿하게 그릇 안으로 몸을 뉘었다. 딱 절반씩 피가 섞이지 않고 그릇 안에서 꿀렁였다.

 

“V. 루미너스.”

 

“V. 팬텀.”

 

말이 끝나자마자 둘의 손목에서 피가 쏟아져 원 밖의 문양을 덮쳤다. 루미너스의 피는 팬텀이 있는 쪽을, 팬텀의 피는 루미너스가 있는 쪽을, 하얀 문양들이 피로 감춰져 보이지 않았다. 루미너스와 팬텀의 손목이 아물었다.

 

원 밖 문양이 빛을 발했다. 흩뿌려진 피를 흡수하면서 빛은 핏빛으로 변하고 바닥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둘의 피가 있던 그릇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릇 안에 있던, 물과 기름 같던 피들이 섞였다. 조금씩 섞일 때마다 루미너스와 팬텀의 몸에 상처가 생겨났다. 그릇 안 피들이 온전히 섞였을 때 루미너스와 팬텀의 몸이 갈라졌다. 온갖 자상이 피를 뿜어냈다.

 

구우우우우우웅

 

그릇이 있던 곳부터 문양이 끝나는 곳까지 진공상태가 만들어졌다. 자상에서 흘러나오던 피들이 공간에 떠올랐다. 계속해 나오는 피들이 위치를 바꿨다. 루미너스의 피는 팬텀에게, 팬텀의 피는 루미너스에게, 핏방울은 주체를 변경했다. 진공이 끝났다. 오롯이 서로의 능력으로 떠있는 피들이 뭉쳐졌다. 몸 곳곳에 존재하는 자상들로 핏방울이 흡수되었다.

 

가까이에 있는 피를 흡수할 때마다 자상들은 하나둘씩 사라졌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서로의 몸에 흡수되고 끝까지 마주보고 있던 오드아이와 자안이 반들거렸다. 그릇 속 섞여있던 피들이 두 갈래로 나뉘어 루미너스와 팬텀에게 향했다. 쇄골 아래를 통해 몸 내부로 들어가고 흔적이 남았다. 루미너스에게는 보랏빛 도는 장미가 팬텀에게는 적 빛과 청 빛이 교차한 하이포시스오리어가 흔적을 대신했다. 은은하게 빛이 나는 흔적이 각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팬텀이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야살스레 올라가는 미소에 루미너스가 팬텀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입술이 마주 닿았다. 팬텀의 입술을 열고 들어간 루미너스의 혀가 활개를 쳤다. 말캉한 입 점막을 쓸고 도톰한 혀를 옭아매며 루미너스가 팬텀의 위를 점했다. 루미너스가 팬텀을 밀자 팬텀이 뒤로 넘어가 바닥에 몸을 눕혔다. 헐떡이는 숨소리와 점막이 겹쳐지는 소리가 뇌를 달구었다.

 

츠읍

 

입술이 떼어졌다. 타액으로 둘의 입술이 반들거렸다. 팬텀의 손가락이 제 입술을 쓸었다.

 

뒈질 때까지 잘 부탁한다.”

 

루미너스가 팬텀의 쇄골을 물었다.

 

뒈질 일 없으니 계속 잘 부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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